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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Life/책거리: 고전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 기억을 위한 몸부림, 또는 기록

by Feverish 2011. 9. 21.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 기억을 위한 몸부림, 또는 기록







조르주 페렉의 <W 혹은 유년의 기억>을 읽었다. 길지 않은 이 작품은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의 자전적 소설이다. 조르주 페렉은 이 소설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묘사하는데, 그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맥락 속에서 유대인 소년으로 보낸 시간을 말한다.






이 작품의 구성적 측면에서 특징을 언급하자면, 작가의 유년시절을 물리적으로 나눠놓은 두 가지 이야기가 얼핏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 각각 세리프 서체와 산세리프 서체로 구분되어 있다. 세리프 서체로 인쇄된 부분(조르주 페렉의 유년기 기억 서술)과 산세리프 서체로 인쇄된 부분(W섬의 이야기)은 교차하며 이어진다. 바로 앞 혹은 뒤에 배치된 이야기들 사이에서 연관관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 포스팅은 페렉의 해당 작품을 '기억과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극도로 편협하게 바라본 결과물이다.)






1. 기억은 정확한가?



책장을 덮는 순간 나의 뇌리를 강타한 질문이 있었다. '글을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쓴다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생각해보라. 머릿속에 없는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써 내려가는 모든 글들은, 자신의 직접적 간접적 경험을 기억하고 그것을 상기해내 종이 위에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 정신 이상자가 쓴 글이라도 기억의 혼합이나 기억의 파편 혹은 뇌리의 전기 신호로 각인된 그 무언가가 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글을 쓰는 행위에서 기억이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기억은 정확한 것인가?"






2. 부정확한 기억, 그렇다면 자료에 의존할 수 있을까?



기억의 부정확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진이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의 기억은 종종 과거 사실을 확대 과정하거나 오히려 사실과 모순될 경우도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겪은 일이라고 기억하던 부분이 알고보니 자신과 전혀 무관한 타인의 기억인 경우도 있다. 자신이 비교적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은 다른 사람(대체로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후에 말해준 것일 가능성이 높다. 기억의 이와 같은 부정확성과 사회적 맥락 등을 생각해보면, 기억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이름을 한 번 쓰면서 세 군데나 철자법을 틀리게 썼다.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57p)



그는 그것도 마찬가지로 기억하지 못했는데도 언제라고 정확히 날짜를 못 박을 수 없지만 그 원인(스케이트, 썰매와의 충돌, 뒤로 넘어진 것, 어깨뼈의 골절)과 결과(깁스를 할 수 없었던 일, 장애인처럼 보이게 했던 보조 기구) 등 모든 점에서 동일한 사건이 필리프에게 일어났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화들짝 놀랐다.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99p)



한때는 수재 소리를 들었던 과학영재였으나 대학 시절에는 화염병을 던지는 열혈 운동권이었고, 90년대에는 세계경영을 꿈꾸던 굴지의 자동차회사 직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 회사가 구제금융 시절에 부도가 나자 홀연 필리핀으로 건나가 무역업을 했는데, 그게 쫄딱 망하는 바람에 결국 편의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점주 같은 사내들이 꼭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던 그들을 나는 속으로 '깨나'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 속 '깨나' 썩이던 깡패였지만 마음잡고 사회에 나와서는 돈푼 '깨나' 만진 적이 반드시 한 번은 있었고 한창때는 여자 '깨나' 울렸다. 그러나 결국 다 날려먹고 비록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이게 자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 그들 입에서 나오는 화려한 과거는 대부분 공동창작이고 일종의 민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들은 전설적인 영웅담을 표절, 짜깁기한 것에 불과했다. 친구 얘기, 영화에서 본 것, 친구가 겪은 일이 뭉뚱그려져 어느새 자기 얘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김영하, <퀴즈쇼>, 101p~102p)

 

반면 자료에 의존한 기억은 그나마 신뢰성을 갖추게 된다. 페렉은 123p에서 의도적으로 자료를 인용하는 서술 양태와 기억을 회상하는 서술 양태 사이의 간극을 벌려놓는다.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a) 군데군데 몇 개의 하얀 점이 박힌 까만 염소가 있는데 사진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어서 부분이 잘려 나갔다. 아주 긴 턱에 수염이 난 염소이고 말뚝에 매여 있을 텐데 사진에 찍히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b) 그리고 숙모. 숙모는 말단이 약간 접히고 주름을 분명하게 잡은 회색의 순모 바지, 반소매거나 소매를 걷어 올린 밝은색의 블라우스(혹은 셔츠), 단추 하나만으로 여며서 어깨에 걸친 앙고라 윗도리 차림이었다. 보석으로 꾸미지는 않은 것 같다. 머리카락은 뒤로 넘기고 가운데로 가르마를 탄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약간 쓸쓸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녀의 품 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c) 머리통이 검은색인 흰 염소가 그리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아마 어미인 것 같은 염소가 있는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d) 그리고 내가 있다. 왼손에 염소 다리를 하나 쥐고 있고 오른손에는 숙모의 것으로 보이는 밀집, 혹은 천으로 된 하얀 모자의 안쪽을 우리의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듯 들고 있다. (....) g) 비교적 짙은 털빛의 마구를 갖추고 눈가리개를 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사진 왼쪽 가장자리에서 (...)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123p)



이건 비정상적으로 세부적인 서술이다. 염소나 말의 경우와 같이 페렉의 유년시절 기억과 거의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사물들조차 '자료(사진)에 나와있다'는 이유만으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반면, 기억을 회상하는 서술 양태는 이미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료에 의존한 기억이 완벽한 기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료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다면야 언제라도 기억을 상기해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손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자료 보존의 능력도 향상되고 있으나, 페렉이 작품을 통해 회상하고자 하는 제 2차세계대전 시기에는 (디지털 보존 등과 같은) 현대의 자료 보존 기술 가운데 대부분이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다. 작품에 인용된 대부분의 자료는 '사진의 모퉁이가 잘려있다'느니 '지워졌다'느니, 정확한 회상을 막는 자료의 훼손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





3. 자료조차 훼손되고 사라진다면 기억은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제 2차세계대전은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적 신뢰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인간 이성의 발현과 근대화의 끝에는 원시적인 대학살과 파멸만이 있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다수결은 히틀러의 나치당을 독일의 권좌에 올렸고, 기술의 진보와 과학 기술 발전은 인간을 살상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이 비극은 결국에는 핵무기라는 종결자가 사용되어야 겨우 마무리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에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 페렉의 이 작품 초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나에게는 유년의 기억이 없다'라고밖에 고백할 수 없다면, 그리고 당시의 자료조차 훼손되고 사라져 간다면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일제의 731부대 마루타 그리고 가미카제도 희미해져 가다가 결국 필연적으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J. R. R. 톨킨의 역작, 반지의 제왕에 보면 이런 언급이 나온다.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결국 기억은 전설, 신화. 다시 말해서 이야기로 남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이야기를 설화, 전설, 신화로 인식한다면, 근대 이후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소설'이다.





4. 다시 질문한다.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해본다.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 '글을 쓰는' 행위란 그렇다면 기억을 남기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가장 오래 남는 기억, 백 년을 가는 전설과 천 년을 가는 신화가 되려면 기억은 이야기로 거듭나야 한다.


페렉이 정신병으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유년과 대면하고 이 작품을 서술하게 된 이유를 감히 추측해본다.


조르주 페렉은 인간 이성이 최대한 발현된 결과인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영원히 남기려는 노력으로 이 작품을 서술한 것이 아닐까?


시대상이 많이 배제된 보편적인 유년기를 적어내려간 세리프 인쇄 부분과, 제 2차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를 극한으로 보낸 산세리프 인쇄 부분을 극도로 대조시키며 평행 배치함으로서, 인류 역사에 남았던 오점을 극명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W 또는 유년의 기억
국내도서>소설
저자 :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 이재룡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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