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나 아렌트>
- 지식인의 갈등 그리고 결단
영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2013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일환으로 재개봉하여 그 영화를 보았다.
1.
이 영화는 <로자 룩셈부르크>, <비전>에 이은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여성 3부작 중으로,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좋은 작품이다.
영화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활동했던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삶 중에서도 그녀의 중심 사상이 형성된 배경과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에 대한 전범재판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아렌트는 "가장 큰 악은 오히려 평범함 가운데에서 나타난다"라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주장한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이 주장이 형성되는 과정.
2.
이 영화는 <로자 룩셈부르크>, <비전>에 이은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여성 3부작 중으로,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좋은 작품이다.
독일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하이데거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했던 아렌트는 나치가 집권하자 미국으로 망명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뉴욕에서 계속 머물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재판이 이스라엘에서 열리자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예루살렘에 파견된다. 재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은 잘못이 없고 다만 상부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이히만의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렌트는 그 주장 속에 일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권위'의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며, 이러한 무비판적 행동으로 인해 홀로코스트와 같이 거대한 비극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크고 심각한 악이 발생한 것은 "근본이 악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banal) 개인이 무비판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잡지 <뉴요커>에 기고한다. (이 원고는 이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된다.) 그리고 이 원고는 유대인 사회는 물론 전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아렌트는 <뉴요커>에 기고한 원고에서 "홀로코스트를 아이히만의 단독 책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고, 비판받으려면 동료 유대인을 나치에 넘긴 유대인 장로들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요지를 내세웠고 이 부분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와 함께했던 유대계 지인들은 아렌트의 주장이 민족성을 반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을 욕되게 한다며 비판한다.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아이히만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나치독일을 두둔하는 것 아니냐는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렌트는 민족적 정체성에 복종하는 방향(홀로코스트 비판)과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글을 쓰는 일(진리 추구)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판단하기에 타당한 설명 - 악의 평범성 - 을 거침없이 주장한 것이다.
영화는 이 대목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이히만의 체포장면에서 시작되어 강단에서 "악의 평범성"을 거침없이 주장하는 아렌트의 모습으로 끝나는 과정 속에서 영화는 치밀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그 결론을 거침없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식인의 참 모습을 그려낸다.
3.
폰 트로타 감독은 아렌트나 독일 철학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는 대중들을 위한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아렌트의 과거 회상 씬에서 등장하는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틀을 제공해준다. 또한 아이히만 전범 재판에 대해 익숙치 않은 관객들도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재판 그 자체에 대한 정보(실황 녹화 영상 등)를 충분히 제공한다. 다만 짧은 상영시간에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 한 욕심 때문인지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볼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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