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의 주님봉헌축일에 대한 단상
- 미국전통과 영국전통
0. 요약
대한성공회에서는 주님봉헌축일을 '주의 봉헌 축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는데, 2024년에는 2월 4일에 지킨 모양이다.
영국 성공회나 캐나다 성공회에서는 같은 축일을 1월 28일에 지켰기에 도대체 이 차이가 왜 생기나 궁금해져서 조사해보았다. 결론은 미국전통이냐 영국전통이냐의 차이였다. 주님봉헌축일은 2월 2일로 날짜가 고정되어 있는데, 2024년에는 평일이었다. 그래서 영국 교회와 캐나다 성공회에서는 주일에 미리 기념하였고, 한국 성공회에서는 늦추어 기념한 것이다.
여담으로 대한성공회가 사용하는 '주의 봉헌 축일'이라는 축일명은 도대체 근본이 없다. 영어의 Presentation of the Lord 표현에서 of를 그대로 '의'로 번역해온 모양인데, 이 영어표현에서 of가 의미적 기능을 담당하지 않고 고유격 부여자에 불과한데 그것을 '의'로 번역하는 것은 가당치가 않다. 왜냐하면 현대한국어의 '의'는 명사에 기능/역할을 부여하는 조사이기 때문이다. 아주 너그럽게 생각해서, 과거 한국어처럼 '-의'가 주어역할을 하는 명사에 부착되었다고 치자. 예를들어 '나의 살던 고향' 처럼 화석화된 표현 같은거다. 이때 '나의 살던 고향'에서 '살다'라는 행위의 주체는 1인칭단수 '나'이고, '나의'로 표현되었다. 1 그렇다면 '주의 봉헌 축일' 역시, 용언 봉헌의 주체가 주님인가? 더 가당치않다. 오히려 가톨릭처럼 조사없이 '주님봉헌축일'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한 용어다. 2 3
1. 주님봉헌축일
주님봉헌축일은 성탄으로부터 40일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유대교 전통에 따라 성전에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성탄절이 12월 25일로 날짜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봉헌축일 역시 2월 2일로 날짜가 고정이다. 이날 전례에 사용하는 초를 축복하는 예식을 거행하기 때문에 Candlemas 라고도 부른다. 4
그런데 문제는 2월 2일로 날짜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요일인지는 매해 달라진다는 것이고 주님봉헌축일은 국가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신자들이 이 절기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축일을 주일로 옮겨서 지키는 것을 허용한다.
주일로 옮길 때 어떻게 옮길지는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2월 2일 직전의 주일에 지킬 것이냐 아니면 2월 2일 직후에 오는 주일에 지킬 것이냐. 예를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주님봉헌축일을 주일에 지킬 때에는 반드시 뒤로 미루도록 하고 있다.
2. 이전 주일이냐 다음 주일이냐
2.1 직전 주일
2024년에 영국 교회와 캐나다 성공회에서는 주님봉헌축일을 1월 28일에 지냈다.
영국 교회의 Canterbury Cathedral에서는 아래와 같이 1월 28일에 지켰다.
https://www.youtube.com/watch?v=_z5EqQ_2Aks
캐나다의 경우도 아래 Christ Church Cathedral 처럼 1월 28일에 지켰다.
2.2 직후 주일
이와 달리 대한성공회에서는 2024년에 주님봉헌축일을 2월 4일에 지냈나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AcwRjSxeNk
3. 왜 이런 차이가 생기나: 기도서 차이
즉, 요약하자면 Candlemas를 우리는 1월 28일 주일에 지키는데, 대한성공회에서는 2월 4일에 지킨 것이다.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영국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Candlemas를 주일로 옮기는 사례에 대해 매우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The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Candlemas) is celebrated either on 2 February or on the Sunday falling between 28 January and 3 February.
주님봉헌축일 (Candlemas) 은 2월 2일, 혹은 1월 28일부터 2월 3일 사이에 오는 주일에 기념한다.
출처: 여기
이 전통에 따르면 Candlemas는 높은 가능도(likelihood)로 당겨지고, 오직 토요일일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미루어진다.
반면 미국 성공회의 1979년 현행 기도서에 보면 (17페이지) 축일의 이동이 다소 유동적이다.
Feasts of our Lord and other Major Feasts appointed on fixed days, which fall upon or are transferred to a weekday, may be observed on any open day within the week.
날짜가 고정된 우리 주님의 축일이나 기타 주요 축일 가운데 평일이 되거나 평일로 옮겨진 경우에는 주중 아무 날이나 빈 날에 기념할 수 있다.
Candlemas는 성탄절 부활절 등과 함께 우리 주님의 축일 가운데 하나이다.
4. 애초에 같은 성공회인데 왜 기도서 규정이 다르게 되었나
그런데 같은 뿌리의 성공회인데 애초에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영국교회와 더 나아가 세계 성공회의 초석을 다진 신학자이자 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였던 캔터버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가톨릭의 허례허식을 일소에 제거하고자 하였다.
특히 몇몇 축일과 수도회적 전통을 '중세 가톨릭의 잔재' (미신적 행사)로 인식하고 이런것들을 마치 '검수완박'하듯이 돌격대 식으로 공격했다. 지금의 성공회 성격으로 봐서는 이게 상당히 낯선데, 원래 바이러스도 처음에 독하고 점점 독성이 약해지지 않는가? 종교개혁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크랜머가 일소 대상으로 삼은 제1호가 바로 이 Candlemas였다.
영국 종교개혁 직전 잉글랜드에서는 Candlemas에 엄청 화려한 케이크와 기타 bakery가 동원되었다. 아마도 사순절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님의 축일을 축하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하등 문제가 없지만 정말 문제는 행사 진행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교구 신자 삥뜯기 (아마도 헌납이라는 좋은 명분을 붙였겠지) 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큰 기치 중 하나가 바로 중세 가톨릭이 민중을 대상으로 면벌부(면죄부)니, 뭐니 하면서 착취했다는 것 아니었는가? Candlemas 행사 비용 충당을 위한 헌금 강요 역시 이런 착취의 일종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크랜머는 이 꼴을 정말 못 보았기에 아예 Candlemas를 폐지해버린다.
시간이 흘러 19세기가 되었고 옥스포드 운동(Oxford Movement)이 성공회의 전례를 다시 가톨릭에 가깝게 돌려놓는다. 옥스포드 운동은 이전에 '잘못' 폐지되었던 많은 전례를 회복시켰는데, 이때 Candlemas도 부활한다. 문제는 이 부활의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독립적으로 다르게 부활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날짜 결정에 세세한 부분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낭비의 상징이었던 Candlemas 케이크는 두 성공회 전통에서 모두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5
- 이 표현에서 of를 좀 더 파보자. 동사구 "present the Lord" (주를 봉헌하다) 를 명사화함에 있어서 presentation the Lord 가 비문이 되므로 the Lord에 격을 부여하기 위한 오직 그 하나의 목적으로만 of가 삽입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 현대 한국어라면, "내가 살던 고향"이 더 자연스럽다. [본문으로]
- 참고로 일본어의 の는 명사간 연결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다소 영어의 of와 분포가 비슷하다. [본문으로]
- 또한 이 축일은 과거의 성모의 정결례 축일로 기념되기도 하였으나, 이 전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본문으로]
- 여담이지만 캐나다에서는 이 Candlemas 케이크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전통이 2023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주교는 눈감아준 채, 다른 각종 명분을 붙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물론 이를 위해 신자들 삥 뜯는 전통은 캐나다에서도 없어졌다. 캐나다에서는 왜 케이크 전통이 유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만 추측만 할 뿐이지만, 아마도 캐나다는 국경 남쪽의 배신자들(=미국)에 대한 반감이 청교(puritan)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즉, 어떠한 전통이든 폐지하는 것이, 그것이 영국교회 권위의 관할에서 이루어진 것이든 청교에서 '창조'된 것이든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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