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oling centre 혹은 resilience hub
기후변화로 여름이 갈수록 더워지고 있다. 취약계층이 편안하게 무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서 설립하는 '무더위 쉼터'는 cooling centre (일상적) 혹은 resilience hub (학술적)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Heat-wave shelter 등 shelter를 사용하는 표현이 보이나 이는 의도치 않은 함의를 전달할 수 있다.
1. 청소년 쉼터, 노숙인 쉼터... 그러니까 무더위 쉼터도 shelter?
한국어로는 '쉼터'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영어로도 같은 단어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물위에 뜨는 '배', 먹는 '배', 신체부위 '배'와 같이 동음이의어와 같은 경우는 모두가 적당한 영어 대응표현을 찾을 테지만, 한국어 표현 '쉼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 단어는 최근 파생의 정도가 많이 확장되어 영어표현으로 여러개 대응된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왕왕 존재한다. 일례로 '조카'는 영어로 성별에 따라 neice와 nephew로 구분한다. 영어의 sister는 한국어로는 무려 언니, 여동생, 누나 이렇게 3가지로 대응될 수 있다. 소쉬르 이후 구조주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언어간 기표의 일대일 대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생각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더 적지 않겠다.
'쉼터'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무조건 'shelter'로 옮기는 것은 마치 성별 관련없이 조카를 nephew로 옮기는 것과 같다. 조카의 성별이 여자라면 neice로 옮기는 것처럼, 같은 쉼터라도 청소년쉼터나 노숙인 쉼터는 shelter로, 무더위쉼터는 cooling centre나 resilience hub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
2. Shelter = 밤을 안전하게 보내는 곳
'쉼터'가 곧 영어 표현 'shelter'로 대응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shelter가 가지는 의미 구성요소 가운데,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안전히 보내기 위한 시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shelter의 의미는 집은 아니지만 지붕과 침대가 있는 공동 시설에 가깝다. 우리말로는 오히려 '대피소'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대형 영어 말뭉치인 Corpus of Contemporary American English (링크)에서 용례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animal shelter등 동물보호시설이나 노숙인 보호시설homeless shelter 아니면 자연재해/가정폭력 대피소 등으로 쓰인다. 한낮에 무더위를 피해 시원하게 머물다가 가는 사랑방 느낌의 단어는 분명 아니다.
반면, 한국어 표현 '쉼터'는 말그대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지시한다. 집이 아니고 단기간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는 통하지만 반드시 밤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쉬다'는 오히려 속어적으로는 '긴밤'의 반대 의미로서 '잠을 자지 않고 잠시만 머물다'는 뜻을 띄기도 한다. (아래의 기사 참조)
3. Cooling centre 혹은 resilience hub
'무더위쉼터'에 대응하는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표현은 단연 cooling centre이다. 미국식 철자법으로는 cooling center라고 쓴다. 아래 그림은 미국 서부 워싱턴 주의 도시 Seattle에서 사용하는 공공 안내문에서 사용된 예시이다. 북미 대륙의 반대편 뉴욕에서도 cooling centre를 쓴다. 심지어 뉴욕에서는 온라인으로 cooling center를 찾을 수 있는 사이트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링크)
그렇다면 resilience hub란 무엇인가?
Resilience hub는 장차 cooling hub를 대체할 것으로 생각되는 어휘이다. 또한 공공복지 분야 논문 등의 전문 영역에서는 resilience hub를 사용하는 게 오히려 타당할 경우도 있다. Resilience hub는 여름에는 무더위쉼터, 태풍이 오면 수해민 대피소, 겨울에는 혹한쉼터(?)가 될 수 있는 지역사회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외에 기후변화로 인해 고통받는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시설을 resilience hub라고 부를 수 있다.
Resilience hub는 지난 2022년 11월 개최된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7)에서 언급된 개념이기도 하고 이에 따라 The Economist의 The World Ahead 2023에서 선정한 23개 핵심 단어들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링크)
이코노미스트에서 정의한 resilience hub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Resilience hub는 한 지역사회 내의 지정 건물(혹은 경우에 따라 운송 컨테이너로 만든 소형 공간)로서 공조(空調)되는 대피 공간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마실 물과 인터넷 그리고 휴대전화 충전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Resilience hubs are designated buildings—or, in some cases, pods made from shipping containers—within a community that provide air-conditioned places of refuge with drinking water, internet access and phone-charging facilities.
4. 잘 된 사례들
한국은 공식적으로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국가는 아니지만 최근 코로나 사태 등을 겪으면서 살펴본 바로는 영어가 공공행정 영역에서 준 공용어의 위치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영어공용화론이니 뭐니 하여 20년 가까이 전에는 사회적 논쟁이 거셌는데, 이러한 논쟁은 이제 간 데 없고 자연스레 비-한국어 화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영어가 사용되는 세상이 되었다.
영어가 자주 사용될수록 올바른 번역과 자연스러운 영어 표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영어로 '잘' 표현하기 위한 시도도 늘어간다. 1
'무더위쉼터'의 경우는 전국에서 행정적으로 동일한 표식을 사용하고, 거기에 포함된 영어표현도 cooling center라고 적어서 매우 잘 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 노파심에 적지만 자연스러운 영어라고 하는 건 '영미권 원어민들이 쓰는 표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제어(lingua franca)로서의 영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불필요한 오해나 착각을 유발하지 않는 영어 표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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