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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Life/책거리: 오늘

김연수 장편소설 <원더보이> - 누군가가 세상을 고쳐주겠지

by Feverish 2012. 6. 29.

 





김연수 장편소설 <원더보이>
- 나 대신 누군가가 세상을 고쳐주겠지

 

 


김연수의 장편소설 <원더보이>를 읽었다.

 

한때 소년, 소녀였던 이 땅의 모든 '어른이'들이 이 소설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점에서 유쾌한 독서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조금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1. 성장하는 것은 어쩌면 평범해진다는 것

김연수 장편소설 <원더보이>는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년이 사춘기를 보내고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제목과는 달리, 소설의 앞부분을 장식했던 약간의 환상적 요소(초능력, 꿈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의 역할은 말미로 갈수록 희미해졌고,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결국 <원더보이>는 초능력을 가진 '원더보이'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비로소 초능력이 없는 독자들도 개입해서 독서할 여지가 생기는 게 아닐까? 만약에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초능력 소년만을 그렸다면, 단순한 구경꾼 역할에만 머물게 된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이겨 책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러하겠지만, 하이틴 시절의 배경은 무채색의 칙칙한 색깔과 핑크빛이 공존한다.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상실, 그리고 권대령 (그리고 이만기와 쌍둥이)의 추격 등이 주인공의 청소년기를 장식하는 조금의 비극이고, 희진과의 애틋한 감정이나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경험 등이 나머지를 장식한다.




2. 80년대는 왜 자꾸 부르는데?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80년대를 자꾸 불러내는 것(즉, 단순히 시대적 배경으로 80년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인 모순을 자꾸 불러내는 것)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독자로서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만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시대를 독서 과정에서 담아보고자 했던 것 같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설 속에 묘사된 80년대 군사독재 시절과 오늘날의 역행하는 역사 속에서 무언가 평행된 모습을 읽어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작가는 80년대를 단순히 시대적인 배경으로만 그리고 싶어했다는 느낌이다. 80년대 군사독재 시대의 모순은 소설 속에서 꽤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단순한 교통사고가 '간첩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으로 미화되고, 희진의 약혼자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 죽음은 익사로 포장된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 피해자 유가족들이 '난 기억력이 원래 하나도 없다.' '나는 입도 벙긋 안 했다.' ' 그 이야기를 어떻게 말로 하나?' 등의 증언을 하고, 그 증언을 책으로 펴내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된다.
 

 


이것들은 분명 실소가 나오는 에피소드들이다. 그러나 소설 내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것을 큰 소리로 지적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도 않는다. (물론,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나 국가보안법 제 10조(불고지죄)나 똑같아 보이긴 한다.) 게다가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아무런 노력 없이 1987년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87년의 대통령직접선거가 민중의 투쟁의 결과가 아닌, "주어진 것"으로 그려진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

 

 


사실, 작가가 끝까지 쥐고 있었던 카드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정훈, 혹은 희선의 분신이 그것이다. 소설 앞부분에 보면, 정훈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쉽게 공감하고(게다가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킬 수도 있다고 설정된 점에서 정훈의 분신으로 소설이 마무리되었으면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그러나 도대체 왜 작가는 그나마 적극적인 반체제 저항의 모습이자, 어쩌면 소설 내에서 가장 클라이맥스를 이루었을 지도 모를 이 카드를 그냥 버렸을까?




3.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기로 한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저 믿기만 하면 돼."


(91p)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14p)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소설 속에 작가가 이미 다 한듯 하다. 바로 시대를 바로잡으려는 큰 흐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소극주의다.
 

 


책을 덮는 순간 다시 본 위의 인용문들은 나에게 이렇게 읽혔다.
 

 


세상에 불의가 있고, 부조리가 있고, 모순이 있더라도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평화(혹은 정의)를 향해 나아가리라는 점을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지금 이 시대가 잠시 어둡더라도 그건 우리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소설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 주장을 마무리하는 한마디를 남긴다.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정히 다를 거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319p)


 

 

 

 

 

원더보이 319페이지의 일부


 
형들은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세상은 누군가가 (아마도 원더보이가) 나타나서 모순을 해결해주고, 불의를 타파하는 그런 곳인가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80년대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은 아마도 김문수 씨나 이재오 씨일 수도 있다.(그렇다면 형들은 시대를 예전으로 돌리려는 자들과 한통속이다) 아니면 임수경 씨일 수도 있다.(그렇다면 형들은....)
 

 


4. 광화문에서부터 종로 5가까지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 김연수는 89학번이다. 나는 89학번이 아니다. 그리고 89학번은,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80년대 학번의 시대를 표현하되 90년대 학번의 시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89학번이다.

 

 

그래서 소설 <원더보이>에서 소설가 김연수는 작가고, 나는 독자다.

독자로서 내가 <원더보이>를 통해 얻어가는 가장 큰 것은, 2012년 서울 종로 거리를 걸으면서 1974년 기억의 서울과 1980년 기억의 서울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 속에서 '도서출판 선사상'이 있었다는 종로2가 YMCA옆 골목은 나에게도 사연이 있는 곳이다. 출판사가 없어지고 그곳에 번역회사가 들어섰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번역을 배웠던 번역학원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마련되어 있는 광화문, 종로 일대의 야경 모형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으로 종로타워 빌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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