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활동 당시였던 2003년 성두현이 발표했던 사회주의 운동 노선 관련 글 '사회주의로 가는 우리의 길'을 여기에 아카이빙 목적으로 다시 올립니다. 민노당 해체 이후 검색엔진에서 검색하려고 해도 찾기가 어려웠기에 보관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사회주의로 가는 우리의 길
성 두 현
1.왜 변혁의 경로문제를 지금 시기 중요한 문제로 설정해야 하는가?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는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가 되고 있다.
IMF사태라는 한국자본주의의 위기를 맞아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정권은 위기 돌파책으로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 공세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삶은 파탄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빈곤자살’과 가족동반자살의 급증, 생계문제로 인한 이혼의 급증과 가족의 해체,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의 부담, 출산율의 급감, 계급간 격차의 급속한 확대와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대물림, 인간과 인간사이의 무한경쟁의 격화는 인간다운 삶의 확보를 향한 노동자, 민중의 열망과 갈구를 고조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 공세속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활동가들은 현재의 질서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자살이라는 극한수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절규와 피울음이 온세상을 뒤덮고 있다.
인간다운 삶은, 자본주의적 질서를 타파하는 것, 자본주의적 인간관계를 연대와 평등의 인간관계로 대체하는 것, 사회주의의 실현없이는 불가능하다.
더 이상 현실의 요구와 현실의 투쟁과 사회주의의 실현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사회주의를 먼미래의 일로 치부하는 허구적이고 게으른 태도는 허용될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대중의 열망과 요구, 절규에 즉각적인 대안, 이행적 강령으로 답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심을 기울여 투쟁하여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현재의 문제로 설정하고 투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경로를 진지하게 고민하여 찾아내고 실천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실현을, 사회주의자연하는 하나의 장식품으로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이를 실현하기 위한 경로를 지금,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경로는 하나의 전략적 침로로서 이 침로를 따라 실천할 때에만 역량을 정확하게 배치하고, 가장 빠른 기간안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며, 중간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목표는 사회주의변혁인데 그 경로가 변혁을 제약하는 것이거나, 혹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경로를 따라 실천되는 활동은 결코 사회주의 변혁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실천활동은 서서히 변질되어 종국에는 부르주아적 질서내의 운동으로 전락할 것이며, 후자의 경우라면 역량의 낭비만을 초래한 채 실패하고 말 것이다.
1)의회주의적 방식으로는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87년 6월 투쟁이후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은 군사독재시절과 비교하여 전체투쟁에서 선거투쟁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왔다.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지자체선거의 실시 시기가 일치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에서 부르주아 정치, 선거일정은, 선거없는 해가 오히려 특이한 해가 될 정도로 일상사가 되고 있다.
이제 선거참여 여부는 군사독재정권시절과 비교하여 더 이상 진보세력내에서 진지한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선거에의 참여를 원칙적인 차원에서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이며 선거참여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 계급역관계상 선거참여가 역량의 낭비만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 정도이다.
의견차이는 선거참여여부가 아니라 선거투쟁의 의의와 비중을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다. 즉, 개량주의적 성향이 강한 세력들은 선거투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배치하고 있고, 변혁적 성향이 강한 세력들은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배치하고 있다. 진보세력전체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의견차이로 들어가면, 장상환 교수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이면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만이 선거투쟁우위론에 서 있을 뿐, 사실상 대중투쟁우위론에 있어서 의견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 더 나아가면 선거투쟁우위론에 서서,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역시, 장상환 교수와 같은 ‘주관적’ 사회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80년대, 90년대 초반에 형성된 인식의 연장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서구의 경험, 한국사회의 현실이 선거투쟁우위론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거칠게 말하면 생산(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주의의 전면적 실현을 핵심적 내용으로 한다.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없이는 불가능하다. 선거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집권하여 기존국가기구를 인수,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생산(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주의의 전면적 실현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은 서구의 경험이, 그 사례를 열거하는 것이 지루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 없이 입증해주었다. 집권은 하나의 수단인데 의회주의적 방식으로는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그 집권세력은 집권후 부르주아지의 저항과 사보타지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현실화할 수 없게 된다. 집권을 했지만 변혁을 추진할 기본적인 동력조차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현실로 오면 선거투쟁을 중심에 놓는 실천은 아예 집권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집권을 가능하게 할 주체역량조차 형성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국가보안법과 곳곳에 잔존하는 파쇼적 제도 등과 같이 진보세력의 성장을 억압하고, 집권을 봉쇄하는 틀을 분쇄해내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한 실천을 통하지 않고 집권에 이를 수 있는 주체역량과 제도적 틀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국사회의 현실에서는 유치한 백일몽에 불과한 것이다.
2)부르주아민주주의 진전에 따라 부르주아정권의 타도, 대체권력의 수립, 혹은 이중권력 상태를 통한 부르주아정권의 타도라는 경로는 현실적 타당성을 잃고 있다.
한국에서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사회주의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실천적 고민을 제기해오고 있다. 즉,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이에 따라 확대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어느 시기에 부르주아정권을 타도하고 대체권력을 수립하거나, 혹은 이중권력상태를 통해 부르주아정권을 타도한다는 전략적 관점을 갖고 현재의 투쟁을 배치해가야 하는가, 아니면 부르주아민주주의질서내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최대한 밀어붙이고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역량을 확대하면서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집권 이후 민주주의를 전면화한다는 전략적 관점아래 현재의 투쟁을 배치해가야 하는가하는 실천적 고민을 제기해오고 있다.
과거의 군사독재시절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진보세력 모두에게 군사독재의 타도와 대체권력의 수립은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것으로 설정되었었다. 논란은 대체권력의 성격을 두고 벌어졌을 뿐이다. 때문에 당시에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상이한 역사적 맥락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으로 많은 시사점을 주는 사례로서, 하나의 실천적 준거틀로 연구되고 학습되었었다. 러시아혁명의 경험은 기존국가의 타도와 이중 권력의 예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군사독재시절의 경로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진전된 현재에도 여전히 타당한 경로인가?
문제를 간명하게 정리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은 전형적으로 부르주아계급의 수동적 혁명의 성격을 갖고 있다. 87년 부르주아지배계급은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몇가지 개량적 조치로 민중의 민주주의투쟁이 대체권력의 수립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후 부르주아지배계급은 부르주아계급내 분파경쟁과정에서 매우 제한된 것이지만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확대해감으로써 노동자, 민중에 대한 헤게모니 능력을 유지해오고 있다.
부르주아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군사독재정권과 달리,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식과 행동을 고양시키지만 다른 한편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 자체가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성과물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 민중 자신의 것’으로 인식되고 또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발전에 따라 스스로를 적응시켜간다는 점에서, 노동자, 민중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공격, 전복시키려는 행동을 봉쇄, 회피해갈 능력을 갖고 있다. 부르주아민주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고조되어 위기에 처할 경우, 양보라는 형태로 일시적 후퇴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며, 반복되는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노동자, 민중이 자신의 의지를 직접적 공격, 전복의 길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길로 표현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현행국가의 전복으로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이다.
이점은 실천상 중요한 내용을 도출하게 한다.
그것은, 노동자, 민중이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 공격, 전복의 길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대응능력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길을 통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공격해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민중이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최대한 밀어붙여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설정해논 제한의 범위를 확장하여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한 방어력을 약화시키고 밖으로부터뿐만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공격해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의회주의적 경로도 아니고 현행국가의 타도도 아닌 새로운 경로의 설정이 필요하다.
의회주의적 경로를 통해서는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현행국가의 타도라는 경로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변화된 현실에 맞추어 변혁을 향한 새로운 경로의 설정이 필요하게 되고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뒤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기 전에 새로운 경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현행부르주아국가의 질서내에서조차 최대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 노동자, 민중의 자치적 역량과 조직을 최대한 발전시킨다.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최대한 확장시켜낸다. 대중투쟁을 통해 주체적 역략을 확대, 강화시키고 국가안팎에서 변혁의 근거지를 확대강화한다.
역량의 강화의 어느 시점에 선거를 통해 집권한다. 집권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전면화한다. 기존국가기구를 변형시켜가고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질적 도약을 이루어낸다.”
4)이러한 전략적 방침하에 투쟁을 전개해감으로써 의회주의적 일탈과 무정부주의적 역량분산 모두를 배격, 방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전략적 방침을 채택하는 것은 한편에서 대중투쟁을 후위로 배치하는 선거주의와 부르주아국가기구를 그대로 인수하여 사용하려는 국가도구주의적 실천을 배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주체역량을 강화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제시하는 틀에 제약되지 않고 오히려 이 틀을 확장시켜내어 기존국가를 도구로 간주하는 관점을 배격하고 기존국가를 개조해가는 전략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이는 선거투쟁을 단순한 활용론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집권과 변혁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중요성을 재배치하여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2.새로운 변혁경로는 민주주의투쟁의 의의에 대한 재조명을 요구한다.
새로운 변혁경로는 부르주아질서내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최대한 확장하고 집권 이후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가는 것을 핵심적 내용으로 한다.
1)부르주아질서내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은 민주주의투쟁을 통해 현행국가밖에서 노동자, 민중의 자치조직을 확대하고 현행국가의 제한된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투쟁속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자치조직을 확대해가고 투쟁의 대상인 현행국가를 주어진 고정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최대한 개조해가야 한다. 예를 들어 국회로 대표되는 대의기구의 극히 제한된 ‘대의성’을 확장시켜내고 공직에 대한 선출제를 확대해가고 소환제를 도입, 확대해가야 한다.
이러한 자치조직의 확대와 현행국가의 개조를 통해서만 한국사회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도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집권전의 민주주의 투쟁에 의한 자치역량의 강화와 현행국가의 개조는 집권이후 민주주의를 전면화 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2)집권 이후 기존국가에 대한 개조는 더욱더 중요한 과제가 된다.
맑스의 잘 알려진 언급,“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존 국가를 그대로 인수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언급이 실천적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될 때가 바로 집권 이후이다.
맑스의 언급처럼 기존국가기구는, 의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대로 인수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술적 도구가 아니다. 기존국가기구는 집권을 통해 인수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이 변혁의 과정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구가 아니라 그 제도와 인적구성에서 자본주의적 성격이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는 기구이며 만약 철저히 개조되어가지 않는 경우 부르주아지의 저항과 반동의 근거지로 역할하게 되는 그런 기구이다.
따라서 기존국가에 대한 개조는 집권전과 비교하여 더욱더 중요한 과제가 되며 대중의 민주주의투쟁은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집권이전에 형성된 자치조직의 역할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변혁의 과정에서 새로운 동력과 활력을 확보하고 전진해야 한다.
3.새로운 경로는 기존 국가의 변형에 대한 적극적인 관점을 요구한다.
새로운 경로의 의미는 일련의 민주주의 투쟁에서 기존국가기구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새로운 경로는 기존국가의 그대로의 인수, 활용을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권 이후 기존국가기구의 즉각적인 파괴와 대체권력의 창출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경로는 기존국가기구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파괴가 아니라 기존국가기구의 가장 반동적인 억압기구와 이데올로기기구의 파괴와 기존국가기구의 정당한 기능의 재조직화, 자치기구의 확장과 이들의 통합화를 통한, 기존국가기구의 일련의 변형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경로는 부르주아억압기구와 이데올로기기구의 파괴를 그안에 포함하는 기존국가기구의 변형과정이다.
이러한 기존국가의 변형은 일련의 민주주의투쟁과정에서 어떤 질적 단절의 단계가 있어야 함을 함축한다. 따라서 새로운 경로, 국가변형론은 기존국가의 연속과 불연속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경로는, 결코 순수히 평화적인 이행과정이 아니다. 직선적인 전진만의 과정도 아니다. 새로운 경로는 치열한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치열할 공방과정이고 헤게모니를 유지확대하려는 격렬한 투쟁과정이다.
4.칠레 혁명의 교훈
새로운 변혁의 경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시사점을 얻은 것은 칠레의 경험이었다.
칠레의 경험에서 얻은 가장 커다란 교훈은 과연 선거를 통한 변혁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재검토가 아니라 실제로 변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투쟁주체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방침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옌데 정권은 집권 이후 대중의 자주적 진출에 대한 적극적 의지도 방침도 없었으며 오히려 대중들의 자발적인 자주적 운동과 조직에 통제를 가하려고 하였다. 또한 기존국가기구의 변형에 대한 적극적 관점역시 없었으며 쿠데타의 발발시점까지도 군부의 중립유지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아옌데 정권의 비극은 이들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사회주의변혁을 실제로 목표로 하면서도 그 실현방식에서는 의회주의적 방식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된 태도는 집권 이후 변혁의 주체세력내에서 무수한 혼란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이와는 정반대로 부르주아지와 대지주, 제국주의세력은 아옌데정권의 집권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 반동연합을 결성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아옌데 정권이 인수하여 개조하지 않은 채 변혁의 도구로 사용하려던 구국가기구는 반동연합의 반격의 근거지, 진지로 변해버렸다.
아옌데 정권이 재반격을 시도하려하였을 때 이미 계급역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변혁은 탱크와 전투기의 공격과 대통령궁의 화염속에서 압살되어 버렸다.
칠레의 경험은 선거를 통한 집권과 변혁의 무망함을 보여준 사례라기 보다 사회주의실현이라는 목표와 국가변형론적 경로라는 전략적방침의 부재 내지는 통일 결여가 어떠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맺으며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는 먼미래의 일이 아니다. IMF사태로 상징되는 한국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부르주아지가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더욱더 강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삶은 후퇴, 아니 파탄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전에 투쟁으로 쟁취한 성과는 자본의 공세속에서 하나둘씩 탈취되고 사소한 개량적 요구조차도 자본가, 자본가 정권과의 치열한 대치와 투쟁으로 전화되고 있다. 대중들은 삶의 악화를 막고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가고 있다. 바로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고 이의 대안은 사회주의밖에 없다.
사회주의운동은 미래에 대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잉태한 모순으로부터 출발하여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수단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사회주의는 어느날 없던 것이 갑자기 출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운동이 발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현재 전개하고 있는 하나 하나의 실천이 바로 미래의 사회주의의 시작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현재의 사회주의실천을, 사회주의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침로를 따라 전개해가야 한다.
사회주의실현을 불가능하게하는 의회주의적 경로는 사회주의자들이 채택할 경로가 아니다.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운동을 불모의 무력한 운동으로 왜곡전락시켜버리는 의회주의적 방식의 노선과 적극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
부르주아국가의 타도와 대체권력의 수립이라는 경로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진전된 한국현실에서 더 이상 타당한 경로가 아니다. 군사독재시절의 경로를 관성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정치적 무능력을 노출시키는 것으로 주관적 의도가 어떠하든 역량의 의식적이고 정확한 배치에 장애가 될 뿐이다.
현시기 올바른 전략적 방침은 변혁을 일련의 민주주의투쟁과정으로 바라보고 국가변형론적 관점에서 경로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글에서 나는 핵심적 내용을 중심으로 그 대강을 제안하였다. 나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사이에서 동의뿐만 아니라 반대역시 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국가변형론적 경로를 고민해왔다.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를 미룰 수 없는 시기가 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시간을 쪼개 몇 개월전부터 장석준 동지와 함께 연구와 토론모임을 진행하고 1차로 그 결과물을 사회주의자 여러분들에게 토론용으로 제출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토론을 기대한다.
2003.11.7 성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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