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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번역학: 번역 아님 반역

고정문은 영어로 Fixed Door가 아니다

by Feverish 2017. 8. 19.

고정문은 영어로 뭐라고 할까?
- 확실한 건 Fix door는 아니다.

1. 고정문, 고정된 문

왜 한국의 건물들은 건설할 때는 문을 두 짝 만들더라도 실제 사용할 때는 한쪽을 '고정'시켜놓는 것일까? 한번은 건물관리하시는 분께 물어봤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단열 때문이라고 한다. 또 문의 수명을 길게 쓰기 위해서는 양쪽문을 고르게 사용하는 게 좋은데 한쪽씩 문을 고정함으로써 그런 효과를 얻고자 한다고도 들었다.

고정문 = fixed?



이 포스팅에서 말하는 '고정문'은 열리지 않게 '잠겨' 있는 문이다. 문이 열리지 않도록 잠금장치가 문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하지 않는 문을 고정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2. to fix = 고정하다 + 알파

그런데 위에 사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고정문은 Fixed Door라고 많이 쓴다. 한글만 써 있으면 밋밋해서 영어를 쓴 것이 아니라면, 영어를 병기하는 목적은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장식으로 알파벳을 쓸 게 아니라면 안내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표현으로 써야할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는 한국과 같은 이유로 문을 고정할까? 문이 고장나서 열리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열을 위해서 혹은 문의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 제대로 작동하는 문을 고정해 놓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고정하다'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 동사 fix 가 바로 검색된다. 한국어 고정하다의 뜻이 '한곳에 붙어있게 하다' (표준국어대사전) 이므로, 열리지 않는 문, 쓸 수 없는 문은 고정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Fix는 어떠한가? Fix의 어원을 따라가면 Proto Indo-European root *dhigw-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어휘의 발전과정을 다르게 타고 내려가면 물을 가두는 dam으로도 갈 수 있으니 fix 자체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원의미가 있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정하다의 의미로만 쓰였다.

하지만 문자적인 원래 의미를 떠나 실제 용례를 보면 영어 동사 fix는 '고치다'라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한국어 '고정'도 그렇고 영어의 fix도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전제하는데, 영어의 경우는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의 의미가 두드러져 별도의 용례로 사용되는 것이다. 예컨대 문짝의 경첩이 고장나서 안닫히고 막 움직일 때 "고정시키기 위해 인위적인 힘을 가하는(=fix)" 행동은 "문을 고치는 행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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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Fixed Door는 의도치 않은 중의성을 야기하게 된다. 즉, fix의 의미가 '고정하다'와 '고치다'로 나뉘기 때문이다.[각주:1] 물론 맥락상으로 두 의미가 혼동될 일은 잘 없겠지만, 전후문맥 없이 Fixed Door라고만 적어놓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자적으로만 봤을 때 Fixed Door는 '고정된(=fixed) 문(=door)'으로도, '고쳐진(=fixed) 문(=door)'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문이 고장나서 사람들이 못쓰게 만들어놓고 거기에 '고정문' 푯말을 붙였다고 해보자. '고정문' 푯말에 상응하는 영어표현으로 'fixed door'라고 적어놓는다면, 한국어 표현은 "이 문이 고장나서 쓸 수 없습니다."를 전제하나 영어 표현은 "이 문은 고쳐진 문이므로 쓸 수 있습니다."를 말하게 된다.

물론, Fixed door가 '고정된(=fixed) 문(=door)'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글을 모르는 영어 화자가 Fixed door라고 적힌 푯말을 읽고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해본 후 열리지 않는다는 걸 체험한 이후, "아하 여기에서 fix를 '고치다'가 아니라 '고정하다'의 의미로 사용했구나"하고 깨달았을 때의 일이다.


따라서 한국어 "고정문"을 영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표현이 쓰이는 상황을 생각해봐야 한다.

즉, "이 문을 쓰지 못하게 잠가놓았다"를 살려주는 영어표현으로 "Locked Door" 라고 쓰던지

아니면 "이 문은 쓰지 않는 문입니다"를 살려주는 영어표현으로 "(The) door (is) not in use" 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괄호 안은 생략 가능)

3. 왜 '고정'의 의미는 확장되지 않았는데 fix의 의미는 확장되었을까?

왜 그런걸까? fix의 의미는 "안움직이게 손보다"에서 "손보다"가 분리 확장되서 "고치다"라는 의미까지 확장이 되었는데, 왜 한국어 '고정'은 "안움직이게 손보다"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고 그 의미가 확장되서 "고치다"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가?

자연적인 것은 무엇이든 변동이 존재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람이 '손을 봐서 안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지적 경험이 한국어/한자어 고정과 영어 fix 사이에 공유된다.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힘이 가해졌음이 전제된다. 그러나 한국어/한자어의 경우는 '고정'이라는 표현을 구성하는 개별 음절이 한자로서 별개의 형태소로 분석될 여지가 있다. 무슨소리냐 하면 고정의 '정'이라는 음절이 '확정,' '정기적', '정착' 등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표현에서 공유되기 때문에, 설사 고정의 정의 한자가 정할 정(定)이라는 것을 몰라도 '고정'이라는 한국어 표현의 뉘앙스는 움직이지 않는 것 으로 한정될 가능성이 높다 ('한정'이라는 단어에서도 '定'이 나오지 않는가!)

반면 fix의 경우는 더 이상의 하위단위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 누구도 fix의 PIE 어원까지 쫓아가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fix가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손보다"의 의미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위 표지판의 빨간 영어표기는 "고쳐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1. 여담으로 1938년에 출간된 Facts about Current English Usage에 보면 fix에 대한 항목이 따로 나와있다. 고정시키다와 고치다의 의미가 혼재되는 상황이었던 모양으로, 'Several [linguists] point out that in English this could only mean "fixed to the wall, or fastened into position."'(여러 언어학자들이 영어에서는 fix의 의미가 '벽에 고정하다' 혹은 제자리에 박아놓다'로만 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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