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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기독교: 신앙고백

마음의 어둠을 밝히는 빛 - 데린구유 답사기

by Feverish 2012. 5. 23.

 








마음의 어둠을 밝히는 빛
-데린구유 답사기



이 글은 지난 포스팅을 교회 회보에 싣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원래 포스팅은 인터넷으로 보기 적합하도록 사진들이 많고 문단 구성이 짧게 짧게 되어있는데, 회보에 싣는 목적으로 글을 많이 고치다 보니, 인터넷으로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원 포스팅을 보시려면 클릭하십시오.

 

 

데린구유 내부 사진

 




1.

지난여름, 8박9일의 일정으로 터키에 관광을 다녀왔다. 한국 여행사들의 터키 관광코스는 대체로 8박9일. 거치는 관광지도 대부분 대동소이다. 인천 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에페소와 파묵깔레 그리고 카파도키아를 찍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경로. 차이가 있다면 카파도키아에 가는 길에 에페소를 방문하느냐 아니면 카파도키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에페소를 방문하느냐 정도의 작은 차이뿐이다.

 

터키에는 볼거리가 참 많다. 동서양 한가운데에 위치한 덕에 두 대륙의 색체가 골고루 묻어 있는 건물과 풍경이 여기저기에 흔하다. 이스탄불은 영락없는 유럽 도시이고, 에페소에서 찍은 사진은 흡사 어느 그리스 도시에서 찍은 것 마냥 화려하다. 반면 동부로 갈수록 유럽 색채보다 아시아적 색채가 강해진다. 터키에서는 지중해식 건물 맞은편에라도 어울리지 않게,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양파지붕 모스크가 무척 흔하다. 모스크? 이슬람 사원? 그렇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반드시 모스크가 있고(물론 대도시에서야 높은 건물에 가려지겠지만) 매일 새벽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시다)로 시작되는 기도소리가 어디선가 음악처럼 들려오는 터키는 분명 이슬람 국가다.

 

이러한 터키에서 기독교를 발견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교회를 좀 다녀본 사람이라면 에페소, 안디옥 정도의 터키 지명에서 왠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과 함께 ‘가만, 이번 주일에는 여행하느라 교회에 못 가는데 괜찮을까’ 하는 정도?

 

그러나 사실 터키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배경일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무척 중요한 배경지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는 아라랏 산도 터키에 있고, 모세가 썼던 지팡이들 중 하나도 터키에 소장되어 있다. 또 사도행전에 나오는 각종 지명들이 터키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터키는 성경의 공간적 배경인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매일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붉은 십자가가 당연하다 못해 이제는 나무, 바람과 같은 풍경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땅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성경 지명을 적은 표지판과 화살표는 그저 하품만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낯익은 지명은 그냥 세계사 교과서 어딘가에서 보아서 그렇겠거니 하며 오히려 터키의 이슬람 사원의 고도로 추상적인 문양을 흠모하던 여행 일정의 어느 날, 매번 빠지지 않는 관광코스 중 하나인 데린구유(Derinkuyu)라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지명보다, 그 어떤 기적들보다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던 ‘빛’을 만났다.




2.

데린구유는 쉽게 말하자면, 정치적 지배자의 학살을 피해 대체로 약한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땅속 도시이다. 데린구유로 들어가는 구멍은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뿐만 아니라 그 구멍은 바위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단 굴 안에 들어가자 넓은 토굴이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침략자의 말발굽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고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비를 피하는 개미떼처럼 땅굴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로마 공인 이전의 기독교도들도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학자들은 데린구유에 있는 십자가 모양의 토굴을 초기 기독교인의 예배장소로 추정한다.


지금에야 인공적인 조명시설이 장착되어 있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곳에서는 결코 명랑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플래시를 터뜨려도 사진이 잘 나오지도 않는다.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인 인간이 흙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언젠가 직면해야 하는 죽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일까? 흙 밑인 그곳에는 전기 조명으로도 밝힐 수 없는 원초적인 불안감과 어둠이 상존한다.

 

 

 

 

3.

이 천년 전, 여기 한 무리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지하의 어두움 속에서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말발굽 소리가 나고 누군가 땅굴을 막고 있던 돌을 움직이려 했을 것이고,


 

“기독교도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자,

이들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된 로마군 병사들이

드디어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아채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다”


하고 신자 중 누군가는 체념한 듯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육중한 돌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로마병사가 아닌, 바울의 편지를 들고 온 사자였을 것이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초기 신자들은 땅굴 속에 겨우 하나쯤 켜져 있었을 횃불 주위에 둘러선 채 편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분간해 내려갔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13절, 새번역)


편지의 발신자에게나, 수신자 모두 비참한 상황이다. 그들에게는 형광등도, 양질의 종이도 없었을 것이다. 마음을 벅차게 하는 파이프오르간이나 성가대 찬양은커녕, 소리 높여 찬양을 부를 예배당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보다 그들이 가진 것을 헤아리는 것이 더 빠르겠다. 그들이 가진 것은 끊을 수 없는 연대의식, 그리고 성령으로 가슴 벅찬 마음이 전부였을 것이다.



 

 

4.

낮이 밤과 구별되지 않는 이 데린구유 지하 동굴 속에서, 무언가를 희생하여 불을 피우지 않으면 빛조차 얻을 수 없는 이곳에서, 바울의 편지에 적힌 ‘빛’은 어떤 의미였을까? 스위치를 올리면 언제나 켜지는 형광등의 빛? 시키지도 않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나 카톡이 올 때마다 자기 맘대로 켜지는 핸드폰 액정의 빛? 공동묘지마냥 하늘에 멋없이 비죽비죽 서있는 붉은 십자가 네온 불빛? 당연히 이러한 빛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빛’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너무 당연히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그곳 동굴도시에서, 현대 기술로 밝힌 전등을 제외하면 그 어떤 물리적 광선도 없었지만, 나는 왠지 안에서부터 밝아오는 ‘빛’을 본 것 같았다. 그곳을 거쳐 간 신앙의 선배들도 자신들의 안에서부터 밝아오는 ‘빛’을 보고 스스로 빛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빛을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나의 내면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갖 값싼 불빛으로 주위가 너무 밝아서 참된 ‘빛’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값싼 불빛에 둘러싸인 나는 어둠이었다.


터키에 다녀온 후 나의 성경읽기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빛’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나 자신을 데린구유에 데려다 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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