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Analytics
본문 바로가기
Book & Life/책거리: 오늘

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 내 작은 세상의 전부와 이별하기

by Feverish 2014. 2. 24.

 






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내 작은 세상의 전부와 이별하기




 




1.

읽고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책이 있다.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비틀어지고 망가진 주인공들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나가는 그 이야기는 결코 정말 네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가슴 한켠이 무거워지고 길을 걷다 문득, 밥먹던 도중 김치를 집다가 문득, 그리고 잠들기 전에 문득 소설 속 인물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책이 있다.

 

정이현 신작 <안녕, 내 모든 것>이 그러했다.

 

 

 

안녕, 내 모든 것
국내도서
저자 : 정이현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3.07.01
상세보기

 

 

 

주인공 세미와 지혜 그리고 준모는 94년, 95년. 강남에 사는 10대 청소년이다. 모두에게 선망받는 강남이라지만 그들은 나름의 불행을 안고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지구에 사는 어느 중고생이 고민없이 살겠는가?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게 조금 과하다 싶다. 사기혐의로 부모가 모두 도주하고 홀로 할머니 댁에 남겨진 세미, 교수 부부인 부모님의 불화로 늘 홀로 남겨지는 지혜. 지혜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이든 똑같이 기억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뚜렛 증후군으로 자신도 모르게 기침하듯 욕을 하는 준모까지... 그들 곁에는 서로밖에 없지만 결국 서로는 서로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작별의 <안녕...>을 고한다.




2.

세미가 커다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뭐랄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세미가 부모님과 살던 낡은 아파트가 불현듯 떠올랐다. 곤충들의 배설물과 각종 배달업체의 홍보용 스티커 자국과 아이들의 무의미한 낙서로 어지럽던 현관 앞 벽. 언젠가 나도 내 발목과 같은 높이에다 작은 하트 하나를 그려넣은 적이 있던. 가로등을 등지고 이어 세미의 표정은 살필 수 없었다. 호기심이 인다고 다 입 밖에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윽고 여기 데려와준 그녀가 고마워졌다.
"준모야, 내가 나중에 다 얘기해줄게
(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133p)

 


 

세미는 불행한 가정과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해 끝끝내 친구들에게 숨긴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준모의 과외 선생님에게는 숨기지 않는다. 때로는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숨기는 비밀'이 있게 마련이다.


3.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우선, 당연하겠지만 기억의 대상이 될 과거 사실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확히 전사한 팩트fact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기억할 때, 팩트의 일부만 오롯이 떠올릴 수 있고 빈칸은 상상력과 소설적 서술로 채우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는 학창시절 동창들의 기억이 조금씩 다르면서도 퍼즐 맞추듯 추억을 맞추어 나가는 건 좋은 술안주다. 우리의 기억은 망각과 팩트가 반반 섞인 상태로 생산된다.

 

<안녕, 내 모든 것>에 나오는 세 인물은 이런 "과거 사건을 추억하는 행위"를 구성하는 세 요소를 상징한다.
 
세미는 소설가적 자질(즉, 삶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서술자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지혜는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준모는 문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성우와 세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짐작했을 때 분노를 효과적으로 표출, 세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침착했던 인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준모는 "기억의 대상이 될 과거 사실"의 극단에 서있고, 지혜는 "팩트로서의 기억", 세미는 "현재 시점에서의 재구성"의 극단에 서있다.

 

이러한 분석을 기반으로 할 때, 소설 말미 2014년 현재 시점에서 할머니의 시신을 찾기 위해 지혜와 세미가 과거를 되짚어갈 때, 지혜의 완벽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묻힌 곳은 끝끝내 찾지 못한다. 그것은, 할머니의 시신을 묻으러 가던 당시 운전을 하던 준모가 S시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미와 지혜를 속여 "Y시로 가고있다"고 말했고 세미와 지혜는 Y시에 할머니를 묻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그 기억에 맞추어 과거 사건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던 지혜도 마찬가지였다)

 

4.

<안녕, 내 모든 것>의 작가 정이현은 1972년 생으로, 94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세미, 지혜 그리고 준모와는 연령대가 다르다. 하지만 94년, 9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정이현 작가의 자전적 소설 <삼풍백화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안녕...>에서 세미의 고모가 얼추 작가와 나이가 엇비슷하다. 소설 초반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들어와 정붙일 곳 없었던 세미에게 가장 가까웠던 인물은 고모였는데, 고모는 세미에게 용돈을 주는 등 세미를 동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모습이 고모에게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삼풍백화점>의 연장선상에서 <안녕...>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대목들이 발견된다. <삼풍백화점>의 R은 <안녕...>의 지혜와 닮은 면이 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의 서술자와 고모의 성격도 유사한 면이 있다.

 

 

 

삼풍백화점 - 2006년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국내도서
저자 : 정이현
출판 : 현대문학 2005.12.20
상세보기

 



5.

<안녕, 내 모든 것>은 사춘기 시절에는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되던, 하지만 실제로는 인생의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한 작은 것들과 작별을 고하는 소설이다. 세 친구는 작별하고, 사춘기 시절의 기억들도 언젠가는 세미의 기억에서 망각될 것이다.

 

그리고 정이현은, 그녀의 이전 작품에서 예의 그러하듯 원자화되어 결국 홀로되는 인물들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거울을 바라보면 책을 읽고 있던 나또한 혼자다.


 







 

 

반응형

댓글